현대 사회에서 미(美)의 기준은 날씬한 몸매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이어트는 평생의 숙제처럼 여겨지죠.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3만 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빌렌도르프(Willendorf)라는 마을의 철도 공사 현장에서 고고학자들은 흙 속에 묻혀 있던 아주 작은 조각상 하나를 발견합니다. 어른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11cm 크기의 이 돌조각은 인류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바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of Willendorf)’입니다. 그런데 이 비너스의 모습은 우리가 아는 그리스 신화의 비너스와는 딴판입니다. 터질 듯한 가슴, 흘러내리는 뱃살, 그리고 거대한 엉덩이. 도대체 구석기인들은 왜 이런 모습을 조각했을까요? 오늘은 구석기 예술 속에 숨겨진 인류의 간절한 소망을 읽어보겠습니다.

1. 얼굴 없는 여인, 그녀는 누구인가?
이 조각상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 기괴한 형태에 압도됩니다. 가장 큰 특징은 신체의 특정 부위가 비현실적으로 과장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유방은 턱 밑까지 차올라 있고, 배는 불룩하며, 허벅지는 두껍습니다. 반면 팔은 가슴 위에 아주 가늘게 얹혀 있고, 발은 아예 묘사되지 않거나 매우 작습니다.
무엇보다 미스터리한 것은 ‘얼굴‘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 코,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털실로 짠 모자 같은 것이나 땋은 머리카락 같은 무늬만 덮여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고고학자들은 이 조각상이 특정 인물(예: 철수네 엄마)을 묘사한 초상화가 아니라고 봅니다. 얼굴을 지움으로써 이 여인은 ‘여성 그 자체’ 혹은 ‘어머니‘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2. 지방(Fat)은 곧 생존이다 (다산과 풍요)
이 조각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약 2만 8천 년 전, 혹독한 빙하기였습니다.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하고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마르고 날씬한 몸은 ‘죽음’이나 ‘질병’을 의미했습니다.
반면 두툼한 뱃살과 풍만한 몸집은 ‘성공한 생존‘의 증거였습니다.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해 몸에 지방을 축적할 수 있는 여성만이 혹독한 겨울을 버티고, 아이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구석기 예술에서 표현된 이 과장된 비만은 탐욕이 아니라, ‘생명력‘과 ‘풍요‘에 대한 처절한 갈망이었습니다. “부디 우리 부족의 여성들이 이렇게 살이 쪄서 건강한 아이를 많이 낳게 해주소서.” 이 작은 조각상은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며 임신과 순산을 비는 간절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3. 붉은색의 비밀
발견 당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표면에는 붉은색 안료인 ‘황토(Ochre)‘가 칠해져 있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구석기 시대에 붉은색은 피(Blood)를 상징하며, 이는 곧 ‘생명‘과 ‘재생‘을 의미합니다.
여성의 생리혈이나 출산 시의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색을 칠함으로써, 이 조각상이 가진 주술적인 힘(생명 탄생의 힘)을 극대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당시 인류가 ‘다산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4. 구석기 임산부의 셀카? (새로운 해석)
최근에는 아주 흥미로운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인류학자 르로이 맥더모트(Leroy McDermott)는 이 조각상이 남성이 여성을 보고 만든 것이 아니라,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만든 자화상‘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임신한 여성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보면 어떻게 보일까요?
- 가슴과 배는 원근법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거대하게 보입니다.
- 다리는 아래로 갈수록 급격히 작아 보입니다.
- 자신의 얼굴은 볼 수 없습니다.
이 시각적 비례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의 기형적인 비율과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이것은 남성의 성적 판타지가 아니라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몸과 생명 잉태의 과정을 기록한 최초의 셀프 포트레이트(Self-portrait)이자 주체적인 구석기 예술품이 됩니다.
5. 결론: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가 만든다
전 세계적으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비슷한 형태의 비너스 조각상이 수백 개나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 전역의 구석기인들이 공유했던 공통된 염원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비만인 몸매지만, 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미(美)의 여신‘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 환경과 가치관이 투영된 결과물임을 이 작은 돌조각이 웅변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이제 눈으로 보는 예술(미술)을 넘어, 귀로 듣는 예술(음악)을 창조하기 시작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네안데르탈인도 연주했다는 인류 최초의 악기, ‘뼈 피리‘의 선율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참고 문헌 및 더 읽어보기]
이 포스팅은 고고학 및 미술사학의 주요 해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Naturhistorisches Museum Wien – Venus of Willendorf
-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소장된 오스트리아 빈 자연사 박물관의 공식 페이지입니다. 3D 모델링과 상세 정보를 제공합니다.
- Britannica – Paleolithic Art
- 구석기 예술 전반의 특징과 비너스상들의 의미를 학술적으로 정리한 자료입니다.
- Leroy McDermott – Self-Representation in Upper Paleolithic Female Figurines
- 비너스상이 임신한 여성의 자화상이라는 파격적인 가설을 제시한 논문(Current Anthropology)입니다.
[이전 글 보기] 15. 라스코와 알타미라 동굴 벽화: 왜 어두운 동굴 깊은 곳에 그림을 그렸나?
[다음 포스팅 예고] 17. 최초의 악기, 뼈 피리 – 선사 시대에도 음악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