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플로레시엔시스, 현실판 ‘호빗’과 섬 왜소화 현상의 비밀

J.R.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는 발등에 털이 북슬북슬하고 키가 작은 종족, ‘호빗(Hobbit)’이 등장합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것이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판타지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003년, 인도네시아의 외딴 섬에서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화석이 발견되면서 판타지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다 큰 성인이 되었음에도 키가 1미터 남짓에 불과한 소형 인류가 실제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잃어버린 세계의 작은 주인, 별명마저 호빗인 호모 플로레시엔시스(Homo floresiensis)입니다.

1. 21세기 인류학 최대의 발견

인도네시아 발리섬 동쪽에 위치한 플로레스섬(Flores Island). 이곳의 ‘리앙 부아(Liang Bua)’ 동굴에서 호주와 인도네시아 합동 연구팀은 깊은 흙을 파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하 6미터 지점에서 믿기 힘든 유골을 찾아냅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의 뼈라고 생각했습니다. 두개골이 자몽만 했고 다리뼈도 너무 짧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치아의 마모 상태와 뼈의 성장판을 분석한 결과, 이 유골의 주인은 명백히 30세 이상의 성인 여성이었습니다.

  • 키: 약 106cm (유치원생 수준)
  • 몸무게: 약 25kg
  • 뇌 용량: 약 400cc (침팬지와 비슷, 호모 사피엔스의 1/3)

학계는 이 새로운 종에게 발견된 섬의 이름을 따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라는 학명을 붙였지만, 대중들에게는 ‘호빗‘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해졌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이렇게 작아진 것일까요?

2.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섬 왜소화 현상

이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는 바로 그들이 살았던 ‘섬’이라는 환경에 있습니다. 진화생물학에는 ‘포스터의 법칙(Foster’s Rule)’ 또는 ‘섬 법칙(Island Rule)‘이라 불리는 흥미로운 이론이 있습니다.

“섬에 고립되면 큰 동물은 작아지고, 작은 동물은 커진다.”

육지와 단절된 섬은 자원과 먹이가 한정적입니다.

  1. 에너지 효율: 덩치가 큰 동물은 유지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먹이가 부족한 섬에서는 덩치를 줄여 적게 먹고도 살 수 있는 개체가 생존에 유리합니다. (왜소화)
  2. 포식자의 부재: 반대로 쥐나 도마뱀 같은 작은 동물들은 천적인 호랑이나 사자가 없는 섬에서 굳이 숨어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몸집을 키워 섬의 지배자가 됩니다. (거대화)

실제로 플로레스섬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곳이었습니다.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는 작아졌지만, 그들이 사냥했던 쥐는 고양이만큼 컸고, 대머리황새는 키가 1.8m나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주식으로 삼았던 코끼리의 조상 ‘스테고돈(Stegodon)’조차 섬에 적응해 몸집이 소만큼 작아진 상태였습니다. 즉, 호빗은 퇴화한 것이 아니라, 섬 환경에 맞춰 최적의 상태로 진화한 것입니다.

3. 그들의 조상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누가 이 섬에 들어와서 작아진 것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유력한 가설이 맞서고 있습니다.

① 호모 에렉투스의 후예설 (대세론)

약 100만 년 전, 자바 원인(호모 에렉투스) 무리가 쓰나미나 태풍에 휩쓸려 플로레스섬에 표류했습니다. 섬에 갇힌 그들은 수십만 년에 걸쳐 몸집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호모 플로레시엔시스가 되었다는 설입니다.

② 더 오래된 조상설

손목뼈와 어깨 구조를 분석해 보니 에렉투스보다 더 원시적인(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호모 하빌리스) 특징이 보였습니다.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주 초기의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이곳까지 왔을 수도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입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작은 뇌를 가지고도 정교한 석기를 만들어 사냥을 했고, 불을 사용하며 맹수(코모도왕도마뱀)들이 우글거리는 섬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4. 전설 속의 식인 괴물, 에부 고고(Ebu Gogo)

호모 플로레시엔시스가 더욱 신비로운 이유는 그들이 비교적 최근까지 생존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분석에서는 불과 1만 2천 년 전까지 살았다고 알려졌으나, 최신 연대 측정 결과 약 5만 년~6만 년 전에 멸종한 것으로 수정되었습니다.

그런데 플로레스섬 원주민들 사이에는 ‘에부 고고(Ebu Gogo)‘라는 기묘한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에부’는 할머니, ‘고고’는 무엇이든 먹어 치운다는 뜻입니다.

“옛날 숲속에는 몸집이 작고 털이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그들은 우리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고, 우리가 주는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그러다 우리 아이들을 납치해 잡아먹으려 해서 우리가 그들을 동굴에 가두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

이 전설 속 묘사는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특징과 소름 끼칠 정도로 일치합니다. 약 5만 년 전은 호모 사피엔스가 호주로 가기 위해 이 지역을 지나가던 시기입니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은 이 숲속의 작은 인류와 실제로 마주쳤고, 경쟁 끝에 그들을 멸종시켰을지도 모릅니다. 에부 고고 전설은 그 잔혹한 역사의 희미한 기억 아닐까요?

5. 결론: 다양성의 증거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발견은 인류 진화가 ‘단일한 엘리트 코스’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환경이 다르면 인류는 1미터로 작아질 수도, 뇌가 작아질 수도 있었습니다. 진화의 목적은 ‘더 크고 똑똑하게’가 아니라, ‘그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이었으니까요.

섬이라는 고립된 실험실이 만들어낸 작지만 위대한 인류, 호빗. 그들은 사라졌지만 인류라는 가계도가 얼마나 풍성하고 다양한 가지를 뻗었었는지 증명하는 소중한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인류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다음 시간부터는 우리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지구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을까요? 그 비밀은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힘’에 있었습니다.


[참고 문헌 및 더 읽어보기]

이 포스팅은 네이처(Nature)에 게재된 발굴 보고서와 최신 연대 측정 결과를 반영했습니다.

  1. Nature (2004) – A new small-bodied hominin from the Late Pleistocene of Flores, Indonesia
    •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를 세상에 처음 알린 기념비적인 논문입니다.
  2. Smithsonian Human Origins – Homo floresiensis
    • 호빗의 3D 두개골 모델과 신체적 특징, 생활 환경에 대한 상세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3. National Geographic – The Hobbit: A New Species of Human
    • 발견 당시의 현장 스토리와 섬 왜소화 현상에 대한 쉬운 설명을 담은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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