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 살던 호모 사피엔스는 겉모습만 현대인과 비슷했을 뿐, 지구 생태계에서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덩치는 네안데르탈인보다 작았고, 사자나 하이에나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죠.
그런데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피엔스는 아프리카를 벗어나 순식간에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배를 타고 호주로 건너갔으며, 그곳에 살던 다른 인류와 거대 동물들을 멸종시켰습니다. 도대체 이 짧은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 시기에 일어난 사고 능력의 폭발적인 변화를 가리켜 ‘인지 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은 근육이 아닌 ‘상상력’으로 지구를 정복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 “강가에 사자가 있다” vs “사자는 우리 수호신이다”
동물들도 의사소통을 합니다. 원숭이도 독수리가 나타나면 “조심해! 독수리야!”라는 뜻의 비명(경고음)을 지를 수 있습니다. 초기 인류의 언어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 즉 ‘객관적 실재‘를 전달하는 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인지 혁명을 거친 사피엔스의 언어는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 즉 ‘허구(Fiction)‘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이전의 언어: “저기 사자가 있어.” (사실)
- 혁명 이후: “사자는 우리 부족의 수호신이야.” (상상)
이 작은 차이가 왜 중요할까요?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전설, 신화, 종교, 신 같은 개념이 이때 탄생했습니다.
2. 150명의 한계(던바의 수)를 돌파하다
인간의 사교 능력에는 생물학적 한계가 있습니다.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에 따르면, 한 사람이 친밀하게 관계를 맺고 신뢰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약 150명입니다. 이를 ‘던바의 수(Dunbar’s number)‘라고 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이나 침팬지는 이 150명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서로 얼굴을 알고 친해야만 협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집단은 150명을 넘어가면 분열되고 쪼개졌습니다.
하지만 사피엔스는 ‘공통의 신화‘를 통해 이 벽을 깨부셨습니다. 서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라도 “우리는 같은 ‘사자 수호신’을 믿는다”라는 믿음 하나만 있으면 수백, 수천 명이 협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대규모 유연한 협력: 개미와 사피엔스의 차이
지구상에서 대규모 협력을 하는 동물은 또 있습니다. 바로 개미나 벌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협력은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라서 융통성이 없습니다. 여왕개미가 죽으면 개미 사회는 붕괴합니다.
반면 침팬지는 융통성은 있지만 소규모로만 협력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 두 가지 장점을 모두 가졌습니다.
- 대규모: 수천, 수만 명이 뭉칠 수 있다.
- 유연함: 상황에 따라 협력의 규칙(신화)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이긴 결정적 이유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이 1:1 결투에서는 이길지 몰라도, 사피엔스 수백 명이 조직적으로 포위 공격을 해오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인지 혁명은 우리에게 ‘쪽수’의 힘을 선물했습니다.
4. 슈타델 동굴의 사자 인간 (Der Löwenmensch)
이러한 상상력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가장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있습니다. 독일 슈타델 동굴에서 발견된 약 4만 년 전의 조각상, ‘사자 인간(Lion Man)‘입니다.
이 조각상은 사자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하고 있습니다. 자연계에 이런 생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피엔스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그것을 예술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단순한 도구 제작을 넘어, 추상적인 사고와 예술, 종교가 싹트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5. 현대 사회는 ‘허구’ 위에 세워져 있다
인지 혁명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대 문명 전체가 바로 이 능력 위에 서 있습니다.
- 국가: 한국이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물리적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우리 머릿속의 약속일뿐입니다.
- 법: 정의나 인권은 자연계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 돈(화폐): 5만 원권 지폐는 종이 조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5천만 국민이 “이것은 가치가 있다”라고 믿는 ‘공동의 상상’ 덕분에 우리는 이것으로 밥을 먹고 물건을 삽니다.
우리는 여전히 원숭이와 비슷한 신체를 가지고 있지만, ‘법인(Company)’, ‘국가’, ‘화폐‘라는 강력한 허구를 믿음으로써 80억 명이 협력하는 거대한 지구촌을 건설했습니다.
6. 결론: 이야기하는 동물의 탄생
약 7만 년 전, 사피엔스의 뇌 배선 어딘가에서 우연한 돌연변이가 일어났습니다. 그 작은 변화가 우리에게 ‘거짓말’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고, 그것이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사피엔스는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환경을 정복하고 다른 종들을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언어는 더욱 정교해졌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언어의 기원‘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다 떨기(뒷담화)가 어떻게 인류를 구원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및 더 읽어보기]
이 포스팅은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의 핵심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 Yuval Noah Harari – 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
- 인지 혁명 개념을 대중화시킨 바로 그 책입니다. 인류 역사를 생물학, 역사학, 경제학을 넘나들며 통찰합니다.
- The British Museum – The Lion Man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형 인물상인 ‘사자 인간’에 대한 대영박물관의 상세 해설입니다.
- Robin Dunbar – Grooming, Gossip, and the Evolution of Language
- 언어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결속(뒷담화)을 위해 진화했다는 이론을 담은 명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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