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원주민 기원과 베링 육교: 인류의 마지막 대이동

약 2만 년 전, 지구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습니다. 마지막 빙하기의 절정기(LGM)였던 그때, 북반구의 거대한 물은 꽁꽁 얼어붙어 빙하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해수면은 지금보다 무려 120m나 낮아졌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금은 차가운 바다(베링해협)로 막혀 있는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바닥이 드러난 것입니다.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거대한 땅의 다리, 바로 베링 육교(Bering Land Bridge)가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길은 단순한 다리가 아니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라는 행성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러 떠나는 위대한 관문이었습니다. 오늘은 현대 고고학과 유전학이 밝혀낸 아메리카 원주민 기원의 비밀을 추적해 봅니다.

1. 사라진 대륙, 베링기아(Beringia)

우리는 흔히 베링 육교를 좁고 긴 다리처럼 상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한 면적의 16배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였습니다. 학자들은 이곳을 ‘베링기아(Beringia)’라고 부릅니다.

당시 베링기아는 얼음으로 뒤덮인 불모지가 아니었습니다. 여름이면 야생화가 피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매머드 초원(Mammoth Steppe)’이었습니다. 매머드, 털코뿔소, 들소 떼가 이곳을 누볐고, 그 뒤를 쫓아 시베리아의 용감한 사냥꾼들이 동쪽으로, 더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새로운 대륙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그저 사냥감을 따라 삶의 터전을 옮겼을 뿐이니까요.

2. 유전자가 말해주는 진실

오랫동안 아메리카 원주민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난무했습니다. 잃어버린 이스라엘 부족이라는 설부터, 유럽에서 건너갔다는 설까지 있었죠.

하지만 현대 유전학(DNA) 분석은 단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로 ‘시베리아/동북아시아 기원설’입니다.

  • 치아 형태: 아메리카 원주민의 치아는 앞니 안쪽이 삽처럼 파인 ‘삽 모양 앞니(Shovel-shaped incisors)’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한국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인에게서 나타나는 고유한 특징입니다.
  • DNA 일치: 2013년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2만 4천 년 전 소년(말타 보이)의 유전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유전자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즉,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은 약 2만 5천 년 전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인근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임이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3. 베링기아 정체기 가설 (Standstill Model)

그렇다면 그들은 베링 육교를 마라톤 선수처럼 쉬지 않고 건넜을까요? 최신 연구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북미 대륙은 거대한 두 개의 빙상(로렌타이드 빙상, 코딜레라 빙상)으로 꽉 막혀 있어 남쪽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베링기아라는 고립된 땅에서 무려 수천 년에서 1만 년 가까이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링기아 정체기 가설(Beringian Standstill Model)’입니다. 이 오랜 고립 기간 동안 그들의 유전자는 시베리아의 조상들과는 조금 다르게 독자적으로 변이했고, 비로소 우리가 아는 아메리카 원주민만의 고유한 유전적 특징이 완성되었습니다.

4. 문이 열리다: 켈프 하이웨이(Kelp Highway)

약 1만 5천 년 전, 드디어 빙하가 조금씩 녹기 시작했습니다. 인류에게 남쪽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어떤 경로를 택했는지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맞서고 있습니다.

① 얼음 회랑(Ice-Free Corridor) 루트

내륙의 두 빙상 사이가 녹으면서 생긴 좁은 통로(회랑)를 따라 걸어서 이동했다는 전통적인 가설입니다. 이들이 사용한 독특한 창촉(클로비스 포인트)의 이름을 따서 ‘클로비스인’이라고도 부릅니다.

② 해안 이동설 (Kelp Highway)

최근 더 힘을 얻고 있는 가설입니다. 내륙의 길이 열리기 전에, 이미 배를 타고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입니다. 당시 해안가에는 다시마(Kelp) 숲이 풍부해 전복, 성게, 물개 등 먹거리가 넘쳐났습니다. 이 ‘켈프 고속도로’를 탄 인류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북미를 지나 남미 칠레(몬테 베르데 유적)까지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5. 위대한 여정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베링 육교를 건넌 인류는 불과 1~2천 년 만에 알래스카에서 남미의 끝 파타고니아까지 퍼져나갔습니다. 그들은 북극의 이누이트가 되었고, 북미의 아파치가 되었으며, 중남미의 찬란한 마야와 잉카 문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기원의 역사는 단순한 이주가 아닙니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호모 사피엔스가 유라시아를 거쳐, 마침내 지구 반대편 끝까지 도달함으로써 ‘전 지구적 확산’을 완료했다는 거대한 마침표입니다.

이제 베링 육교는 다시 바다 밑으로 사라졌지만, 그 위를 걸었던 사람들의 뜨거운 도전 정신은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포식자들의 등장은 아메리카 대륙의 거주자들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인류의 발길이 닿자마자 사라져 버린 거대 동물들, ‘메가파우나(매머드, 검치호) 멸종’의 미스터리를 다뤄보겠습니다.


[참고 문헌 및 더 읽어보기]

이 포스팅은 사이언스(Science)와 네이처(Nature)의 최신 유전학 연구 결과를 반영했습니다.

  1. Science (2015) – Genomic evidence for the Pleistocene and recent population history of Native Americans
    • 아메리카 원주민의 유전적 기원이 시베리아에 있으며, 단일한 이주 파동이 있었음을 밝힌 핵심 논문입니다.
  2. National Park Service (USA) – Bering Land Bridge National Preserve
    • 미국 알래스카에 위치한 베링 육교 자연보호구역의 공식 사이트로, 베링기아의 생태와 역사를 보여줍니다.
  3. Nature (2018) – Terminal Pleistocene Alaskan genome reveals first founding population of Native Americans
    • 알래스카에서 발견된 유아 유골 분석을 통해 베링기아 정체기 가설을 뒷받침한 연구입니다.

[이전 글 보기] 20. 구석기 사냥의 진화: 투창기(Atlatl)와 함정이 인류를 최상위 포식자로 만들다

[다음 포스팅 예고] 22. 메가파우나(거대 동물)의 멸종 – 매머드는 왜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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